241106. 겉보기에 완벽했던 선택의 순간들

2024. 11. 6.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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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은 늘 그랬듯 조용했다.

연필이 문제집을 긁는 소리, 지우개 가루를 털어내는 소리, 간간이 들리는 한숨 소리...

그러다 느닷없이 자습실 문이 열렸다. 담임선생님이었다. "너, 합격이야."

순간 내 주변으로 웅성거림이 일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축하한다는 친구들의 말도, 선생님의 설명도 어렴풋이 들렸다.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내가 원했던 대학, 원했던 과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왜 이렇게 실감나지 않을까.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유독 가벼웠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길을 걸었지만 그날만큼은 발걸음이 홀가분했다.

어깨를 누르고 있던 무언가가 스르르 녹아내린 것처럼.

아직 실감은 나지 않았지만, 뭔가 새로운 것이 시작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대학 생활은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시작됐다.

고등학교 때처럼 공부하고, 수업 듣고, 과제하고. 전공 수업도 그렇게 시작됐다.

특별한 설렘도, 거창한 기대도 없었다. 그저 이것도 내가 가야 할 길 중 하나겠거니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랬다.

업을 듣다 보니 '아, 이런 게 내가 생각했던 거구나' 싶기도 했고, 나름 이해도 됐다.

하지만 점점 더 깊이 들어갈수록 낯선 것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식으로 가득한 슬라이드를 보며 멍해질 때가 많았다.

고등학교 때 배운 수학이 이런 곳에서 다시 나타날 줄은 몰랐다.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에서는 전공 용어들과 씨름하느라 정작 배워야 할 내용은 놓치기 일쑤였다.

이해는 되지만 왠지 모르게 거리감이 느껴졌다. 필요한 건 알겠는데... 이게 정말 내가 원했던 걸까?

강의실에 앉아 이론을 배우면서 자주 들었던 의문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했지만, 그런 고민을 꺼내본 적은 없었다.

어쩌면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건지도 모르니까.

 

 

 

 

이런 생각들은 일상의 작은 틈새로 스며들었다.

도서관에서 과제를 하다가, 수업을 듣다가, 혹은 그저 평범한 하루를 보내다가도 문득문득 찾아왔다.

겉으로 보기에 나는 그저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수업도 잘 듣고, 과제도 제출하고, 시험도 봤다.

누군가 물어보면 "그냥 잘 다니고 있어"라고 대답했다. 사실이었다. 잘 다니고는 있었으니까.

다만 그 '잘'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있는 고민들은 말하지 않았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그런데 묘하게도,

시간이 흐르면서 그때의 낯설었던 것들이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수식으로 가득했던 이론들은 문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 되어주었고,

어렵게만 느껴졌던 전공 용어들은 이슈를 이해하는 단서가 되어주었다.

지금 하는 공부와 일에서도 그때의 흔적들을 발견한다.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그때의 배움이 밑거름이 되어 있었다.

그날 교실에서 들었던 합격 소식이 실감나지 않았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건 단순한 합격 통보가 아닌 새로운 시작점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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